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·순천 10.19 사건 (문단 편집) ==== 강경파로 교체 ==== 뒤늦게 진압군사령관을 송호성에서 김백일로 교체하고 25일, 근처에 차단선을 펼치고 있던 군부대까지 싹싹 긁어와 여수를 향해 진격한다. 물론 여수에 14연대의 주력부대는 없었다. 전날 매복당했던 미평리를 무혈 점령하고 여기에서 신중하게 하룻밤을 보낸 후 26일 아침 여수 시가지에 대한 박격포 사격과 함께 장갑차들이 돌진했고, 여수에서는 약간의 무장폭도들이 남아 있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. 하지만 해상의 LST 선상에서 여수로 상륙하는 [[제5보병여단|5연대]] 1대대의 박격포가 [[제12보병여단|12연대]] 수색대를 강타해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.[* 참고로 이 대대의 지휘관인 [[김종원]]은 직후 이를 만회하겠다고 돌산섬 등지를 여기저기 수색시켰지만 허탕을 쳤고, 이를 본 미국 군사고문단은 그의 작전 능력을 형편없다고 평가했다.] 이후 지루한 시가전이 지속되었지만 진압군은 시내 중심부를 속속 탈환해 나갔다. 시가전 끝에 27일 오전, 여수남국민학교에 진압군사령부가 설치되며 완전 수복이 이뤄진다. 그리고 2진으로 도착한 경찰부대는 동료 경찰과 그 가족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한 것을 보고 눈이 뒤집어졌고, 1차 진압군경의 피해 규모를 10배 이상 상회하는 대규모 보복 학살이 시작되었다. 이 사건 이후 12월에 화순·나주 민간인 학살사건도 벌어졌는데 2016년 12월에 돼서야 국가의 책임, 배상을 인정하였다.[[http://v.media.daum.net/v/20161208081103980|대법 "화순·나주 민간인 학살사건 국가가 배상하라"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